죄책감에서 해방되기까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처음에는 AI를 사용하는 것에 묘한 죄책감을 느꼈다. AI가 작성한 보고서로 클라이언트에게 호평을 받을 때면, 마치 부정행위를 한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이게 정말 내 실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불편함의 정체는 '오해'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내 손으로 직접 하는 것'을 실력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엑셀을 쓴다고 해서 수학 실력이 없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AI는 내 실력을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파트너다. 이 깨달음이 마인드셋 전환의 시작이었다.
연구팀과의 AI 워크숍
내가 직접 시도했던 실험이 있다. 4명으로 구성된 연구팀에서 AI 워크숍을 진행했다. 주제는 간단했다. "우리 팀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돌아갈까?" 이 질문에서 출발해서, 현재 상태와 비교하고, 모두가 함께 가려면 어떤 구조를 짜야 할지 토론했다.
결과는 예상보다 어려웠다. 연구원들은 자신이 유연하고 AI를 잘 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고의 구조가 바뀌지 않았다. 연구원들은 계속 나에게 일을 달라고 했다. "제가 AI를 통해서 해 오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일을 주는 것보다 AI에게 직접 일을 주는 게 더 빨랐다. 솔직히 말하면, 그들에게 일을 주는 것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말을 하기도 힘들었다. 말을 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해를 해도 체감하기 힘들었다. 체감을 해도 자기 행동을 바꾸기 힘들었다. 경험을 통해 바뀌긴 하는데, 상당히 오래 걸리는 과정이었다.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뛰쳐나가는 연구원도 있었다. "난 AI에게 내 업무를 맡길 수 없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AI 도입에 대한 저항의 본질
AX 컨설팅을 하다 보면 많은 리더들이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도구는 다 사줬는데, 직원들이 생각보다 AI를 잘 안 써요." "교육도 했고 매뉴얼도 만들었는데, 실제 업무에서는 거의 활용이 안 됩니다." 표면적으로는 기술을 익히는 데 시간이 걸려서, 혹은 도구가 복잡해서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야기를 더 깊이 들어보면 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AI 도입에 대한 조직 내 저항은 기술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존재 가치가 사라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다. "AI가 내 일을 대신할까 봐 걱정된다"는 말 뒤에는 "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사람이 될까 봐"라는 깊은 심리가 숨어 있다.
저항의 근본 원인을 분석해보면 네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정체성의 위협이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는 두려움이 생긴다. 10년간 엑셀 전문가로 인정받아온 사람에게 AI가 더 빠르게 분석한다는 사실은 존재론적 위기로 다가온다. 둘째는 통제감 상실이다. AI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는 무력감이 밀려온다. 어제 배운 도구가 오늘 업데이트되고, 내일은 또 새로운 것이 나온다. 셋째는 학습 부담이다. 새로운 것을 또 배워야 한다는 피로감이 쌓인다. 이미 업무만으로도 벅찬데, 또 다른 스킬을 익혀야 한다는 압박은 거부감으로 이어진다. 넷째는 불확실성이다.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이 발목을 잡는다. AI가 어디까지 발전할지, 내 직업이 5년 후에도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이 두려움들을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AI 도구를 도입해도 조직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 변화의 시작점은 도구가 아니라 마음이다.
컨설팅 현장에서 마주치는 질문들
AX 컨설팅을 다니다 보면 반복적으로 듣는 질문들이 있다. 이 질문들 자체가 저항 심리의 표현이다.
"앞으로 개발자는 어떻게 되나요?" 이 질문 뒤에는 "내 직업이 사라지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이 있다. AI가 코드를 작성하는 시대에 개발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니어는 어떻게 성장하나요?" 예전에는 단순한 업무부터 시작해서 점점 복잡한 일을 맡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단순한 업무를 AI가 처리하면 주니어가 경험을 쌓을 기회가 사라진다. 이 우려는 타당하다. 실제로 Anthropic의 2025년 12월 연구에서도 엔지니어들이 "생산이 쉬워지면 학습 시간이 줄어든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또한 동료와의 협업이 감소했다는 응답도 있었다. 예전에는 모르는 게 있으면 동료에게 물었는데, 이제는 AI에게 먼저 묻게 된다는 것이다. 팀워크와 멘토링의 기회가 줄어드는 문제는 조직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보완해야 한다.
"그래도 사람이 쓴 코드가 낫지 않나요?" 2024년까지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2025년부터는 그렇지 않다. AI가 작성한 코드가 평균적인 개발자보다 낫다. 이 현실을 부정하면 적응이 늦어질 뿐이다.
"주니어를 뽑아야 할까요?" 기업 입장에서 가장 현실적인 질문이다. AI가 주니어 수준의 업무를 처리한다면, 주니어 채용의 근거가 약해진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시니어는 어디서 오는가? 이 딜레마에 대한 답은 아직 없다.
직원 관점의 불안
컨설팅 중인 기업의 AI 전환 로드맵 강연에서 직원 한 명이 솔직하게 말했다. "지금 저 장표가 어떻게 읽히냐면, '너는 필요 없어'로 느껴집니다." 매니저가 AI를 직접 관리하고 실무자 없이 일하는 구조. 조직이 효율화될수록 자신의 자리가 사라진다는 불안감이었다.
이 불안은 비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실제로 조직 구조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축소"가 아니라 "재편"으로 봐야 한다. 같은 인원으로 더 많은 결과를 내는 방향. 이 메시지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으면 저항은 커진다.
AI 매니저로의 마인드셋 전환
AI와 함께 일한 지난 2년은 나에게 단순한 툴 변화가 아니라 사고방식의 대전환이었다. 그 과정에서 얻은 네 가지 통찰은 지금의 AI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철학이 될 것이다.
부끄럼 없이 AI를 사용하라
한 팀원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팀장님, 이 기획서 초안… AI 써도 될까요?" 나는 되물었다. "왜 안 써? 팀원 3명이 3일 걸릴 일을 AI가 30분에 끝내는데." 우리는 여전히 '사람의 스케일'로 일을 계획한다. 하지만 AI가 있으면 10배, 100배 더 큰 결과를 낼 수 있다. 택시를 타는 게 부끄럽지 않듯 AI 쓰는 것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도구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것, 그게 오히려 비효율이다. 팀원의 시간은 비용이지만, AI의 시간은 거의 무료에 가깝다.
자동차와 달리기 시합을 하지 마라
어떤 팀원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AI보다 더 좋은 문장을 쓸 수 있어요." 맞다. 근데 그게 중요할까?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이 걷는 것보다 훨씬 빠른데 "난 자동차보다 더 멋지게 달릴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중요한 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지, 달리기 폼이 아니다. AI와 경쟁하지 말고, AI를 타라. AI는 경쟁 대상이 아니라 활용 도구다.
일꾼이 아닌 매니저가 되라
나는 처음에 "AI가 내 일을 얼마나 잘 대체할까?"를 고민했다. 이건 잘못된 질문이다. 우리의 진짜 질문은 "내가 AI를 활용해서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가 되어야 한다. 최고의 일꾼은 100% 더 잘할 수 있다. 하지만 최고의 매니저는 2000% 더 큰 결과를 만든다. 왜냐하면 AI 10개를 동시에 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 초안은 Claude, 이미지 제작은 Midjourney, 코드 작성은 Cursor. 예전엔 한 사람이 한 가지 일만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한 사람이 팀 전체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단, 각 AI에게 무엇을 어떻게 시킬지 아는 사람만 가능하다.
사람에 집중하라
AI가 업무를 대신하면서, 나는 오히려 사람을 만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팀원들과의 1:1 미팅, 클라이언트와의 전략 세션, 파트너사와의 협력 논의. AI는 문서를 완벽하게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팀의 사기를 북돋우는 일은 못 한다. 이제 리더의 핵심 역량은 "AI를 잘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AI를 잘 활용하도록 돕는 것"이다. 업무 시간보다 미팅 시간이 더 중요한 시대가 열렸다.
일을 받는 사람에서 파트너로
실리콘밸리에서는 연봉 협상이 다르게 작동한다. "내가 열심히 했잖아요"가 아니라 "이게 회사 매출에서 이만큼을 담당하고 있으니까 이만큼의 돈을 달라"고 말한다. 자신의 기여를 숫자로 증명하고 협상한다. 이게 가능하면 파트너십이 된다.
AI 시대에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일을 주세요"라고 요청하는 순간, 그 사람은 AI와 경쟁하게 된다. AI에게 일을 주는 게 더 빠르기 때문이다. 반면 "이 프로젝트 전체를 같이 끌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면 파트너가 된다. 프로젝트의 방향을 정하고, AI를 관리하고, 결과에 책임지는 사람. 그런 사람은 대체되지 않는다.
함께 가는 여정
예전 조직에서 팀 회의를 할 때, 회의록 작성은 늘 누군가의 몫이었다. 지금은 제미나이가 실시간으로 회의 내용을 기록하고, 회의가 끝나면 메일로 보내준다. 처음 이 방식을 도입했을 때, 회의록을 담당하던 팀원이 가장 놀라워했다. 지금은 "이거 없으면 어떻게 회의해요?"라며 만족해한다.
연구원들에게는 제미나이로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연구 레터 작성도 바이브코딩으로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아직 서툰 사람도 있고,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게 자연스럽다.
AI 시대의 마인드셋 전환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전체의 여정이다. 누군가는 앞서가고 누군가는 뒤따라온다. 중요한 건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시장의 압력
변화가 필요한 이유는 도덕적 당위가 아니다. 시장의 압력이다. 경쟁사가 AI로 퍼포먼스를 올려서 가격을 낮추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 회사도 비용을 줄이거나 퍼포먼스를 올려야 한다. 안 하면 망한다. 멸종하거나 적응하거나. 자본주의는 늘 그래왔다.
이 압력은 미국에서 시작됐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이 구르고 나가떨어지고 있다. 1인 창업으로 시작하는 회사들이 AI를 기본으로 깔고 시작한다. 대기업들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 파도가 한국에 오고 있다. 빨리 변화하는 게 유리하다.
다 같이 가려면
내가 해보고 싶은 워크숍이 있다. 조직 전체가 모여서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 회사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어떻게 돌아갈까?" 상상해본 다음, 현재 상태와 비교한다. 그리고 그 상태로 가면서 모두가 함께 가려면 어떤 구조를 짜야 할지 토론한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열어놓고 얘기하는 것이다.
매니저부터 시작해야 한다. 매니저가 직접 회의에서 시켜보면서, 사람 없이 일하는 방법을 먼저 실험해야 한다. 그 다음에 팀원들을 이 워크플로우로 하나씩 옮겨간다. 매니저가 이 그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변화는 개인의 툴 사용으로 끝난다. 조직 전체의 전환은 일어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