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분 만에 책 한 권을 번역하는 시대
한 번은 책 번역 프로젝트를 제안받았다. Claude Code를 실행하고 타이머를 켰다. "이 책을 번역해줘." 단 한 문장을 입력했다. 그리고 지켜봤다.
18분이 걸렸다.
믿을 수 없었다. 혼자 했다면 몇 주는 걸렸을 작업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었다. 내가 일하는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예전에는 내가 모든 세부 작업을 직접 수행했다. 번역할 텍스트를 찾고, 복사하고, AI에게 붙여넣고, 결과를 받아서 다시 복사하고, 문서에 붙여넣는 과정을 수백 번 반복했다. 이 방식에서 나는 '실행자'였다. 모든 단계를 내가 직접 조작했고, 내 손이 멈추면 작업도 멈췄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나는 "이 책을 번역해줘"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Claude Code가 알아서 움직였다. 책을 12개 챕터로 나누고, 각 챕터마다 별도의 작업 프로세스를 동시에 실행했다. 화면에서 12개의 진행 상황이 동시에 업데이트되는 것을 보며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속도 개선이 아니라 작업 방식의 근본적 전환이었다.
나는 더 이상 실행자가 아니라 의사결정자가 되어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원하는지만 명확히 하면 되었다.
AI 작업의 3단계 진화
이 경험을 통해 AI 작업이 세 단계로 진화해왔음을 깨달았다.
1단계: 수동 반복 작업. ChatGPT나 Claude 창을 열어놓고, 한 부분씩 복사해서 붙여넣고, 번역된 걸 받아서 또 복사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 반복한다. 혼자 번역할 때보다는 100배 빠르지만, 두꺼운 책 한 권을 완성하려면 사람이 계속 붙어서 복사+붙여넣기를 수행하며 몇 주 정도 작업해야 한다.
2단계: 프로그램 자동화. 파이썬으로 코드를 짜거나 자동화 도구로 프로그램을 만든다. 파일을 통째로 입력하면 프로그램이 알아서 챕터를 쪼개고, AI에게 보내고, 번역본을 받아서 결과를 정리해준다. 사람은 시작 버튼만 누르면 된다. 단, 이 방법은 AI 서비스의 인증키를 발급받아야 하고, 코드 실행 방법도 알아야 한다.
3단계: 에이전트 자율 실행. Claude Code에게 "이 책 번역해줘"라고 말하면 끝이다. AI 에이전트가 알아서 책을 챕터별로 쪼개고 각 챕터마다 별도의 작업 프로세스를 만들어서 동시에 번역한다. 나의 경우, 12개 챕터가 동시에 번역되는 것을 목격했다.
추상화 수준의 상승
이 3단계를 관통하는 핵심은 '추상화의 수준'이다.
1단계에서 우리는 모든 세부 동작을 직접 지정한다. "이 텍스트를 복사해서 저기에 붙여넣어"처럼 손가락 움직임 수준의 명령을 내린다.
2단계에서는 한 단계 추상화된다. "이 파일의 모든 챕터를 순서대로 번역해"라고 지시하면, 프로그램이 세부 동작을 알아서 처리한다.
3단계에서는 추상화가 최고 수준에 이른다. "이 책을 번역해"라는 목표만 제시하면, 에이전트가 최적의 방법을 스스로 결정한다. 챕터를 몇 개로 나눌지, 동시에 처리할지 순차적으로 처리할지, 어떤 번역 스타일을 적용할지 모두 자율적으로 판단한다.
🧺 비유하자면 이렇다
- 0단계: 손빨래 (직접 번역)
- 1단계: 세탁기에 한 바구니씩 넣고 빼기 (AI한테 여러 페이지를 한 묶음씩 반복 작업)
- 2단계: 컨베이어 벨트로 바구니들을 순차 세탁 처리 (프로그램이 작업들을 차례대로 자동 처리)
- 3단계: "빨래 해줘" 한 마디에 세탁기 12대를 알아서 빌려와 동시 작동 (에이전트가 최적 방법 판단, 병렬 처리)
추상화 수준이 높아질수록 우리는 '무엇을'에 집중하고 '어떻게'에서 자유로워진다. 이것은 단순히 편리함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인지 자원이 해방된다는 의미다.
세탁기에 빨래를 넣고 빼는 반복 작업에 집중하느라 "어떤 빨래를 해야 하는가"를 고민할 여유가 없었던 사람이, 이제 "빨래 해줘" 한 마디로 작업을 위임하고 나면 더 중요한 결정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번역 프로젝트로 돌아가면, 나는 더 이상 "다음 챕터를 어떻게 복사해서 붙여넣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이 번역이 원문의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가?",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문장인가?"처럼 본질적인 질문에 시간을 쓸 수 있다.
Claude Code는 개발자를 위한 코딩 도구로 만들어졌지만, 번역도 훌륭하게 처리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이 작업을 효율적으로 할까?"를 스스로 판단해서 처리한다는 점이다. 더 이상 AI 서비스 인증키를 발급받을 필요도 없고, 복잡한 설정을 만질 필요도 없다. 그냥 파일을 건네며 "해줘"라고 말하면 알아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 실행한다.
이것이 에이전트 시대의 본질이다. AI에게 일일이 복사-붙여넣기 하던 시대는 이미 과거가 되어가고 있다. 2025년을 기점으로, "내가 모든 것을 직접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는 목표를 제시하고 에이전트가 실행한다"는 사고방식으로 전환이 시작되었다.
시스템 사고로의 전환
"창작은 감성과 영감의 영역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믿는다. 뮤즈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며, 완벽한 순간을 포착해야만 작품이 탄생한다고.
하지만 AI 시대의 창작은 다르다. 소설도 시스템으로 접근할 수 있다. 창작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누구나 겪는 문제가 있다. 작품이 길어질수록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1장에서 설정한 캐릭터 특징이 10장에서는 다르게 묘사되고, 초반에 제시한 세계관 규칙이 후반에는 모순된다.
개발자들은 데이터베이스를 설계할 때, 중요한 정보를 한 곳에 모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가져다 쓰는 방식을 사용한다. 회원 정보를 100개 페이지에 각각 따로 적어두는 게 아니라, 중앙의 한 곳에만 저장하고 모든 페이지가 그곳을 참조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면 회원 나이를 수정할 때 한 곳만 바꾸면 100개 페이지에 자동으로 반영된다.
바이브코딩 툴을 사용해 소설을 창작한다면 캐릭터 설정을 중앙에서 관리하고, 각 장을 독립적 모듈로 설계하고, 일관성을 자동으로 검증할 수 있다. 개발자가 코드를 관리하는 방식 그대로다.
가장 감성적인 영역에서 시스템 사고가 통한다면, 다른 모든 분야는 말할 것도 없다. 마케팅 캠페인, 영업 제안서, 채용 프로세스, 고객 응대 매뉴얼 등 다양한 분야의 업무에 모두 같은 원리로 접근할 수 있다. 구조를 설계하고, 요소들을 모듈화하고, AI에게 실행을 위임하고, 결과를 검토하며 개선하는 것이다.
바이브 코딩의 핵심 원리
"There's a new kind of coding I call 'vibe coding', where you fully give in to the vibes, embrace exponentials, and forget that the code even exists."
OpenAI의 공동 창립 멤버 Andrej Karpathy는 2025년 초 X(구 트위터)에서 'vibe coding'이라는 새로운 개발 스타일을 소개했다. 이 스타일은 LLM에게 자연어로 요구사항을 주고, 코드를 실행해 보고 결과의 느낌('vibe')을 확인하면서 필요하면 AI에게 반복적으로 개선을 요청하는 방식이다. Karpathy는 이를 기존의 코드 중심 개발과는 다른 직관적이고 탐색적인 접근이라고 설명했다.
결과를 보고, 느낌이 아니면 수정을 요청하고, 만족할 때까지 반복한다. 이것이 바이브 코딩의 핵심이다. 바이브코딩 방식으로 케데헌 프리퀄 소설을 작성하며 3가지 핵심 원리를 정리했다.
1. 모듈화 사고
소설을 하나의 거대한 텍스트 덩어리로 보지 않고, 독립적인 블록들의 조합으로 바라본다. 각 장, 각 캐릭터, 각 플롯 라인을 별도의 조각처럼 설계해 관리한다. 이것은 레고 블록으로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각 블록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조합하면 전체 구조를 이룬다. 한 블록을 빼내어 다른 블록으로 교체할 수 있고, 새로운 블록을 추가해 구조를 확장할 수도 있다.
장편 창작물에서 캐릭터 설정을 관리할 때 흔히 겪는 문제가 있다. 각 장에 캐릭터 정보를 직접 적어 넣으면, 나중에 설정을 수정할 때 모든 파일을 일일이 열어서 바꿔야 한다. 주인공의 나이를 18세에서 19세로 바꾸려면 12개 파일을 수정해야 하고, 한 곳을 빠뜨리면 작품 전체에 모순이 생긴다. 개발자는 이런 문제를 중앙 관리 방식으로 해결한다. 중요한 정보를 한 곳에 모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참조하는 것이다.
모듈화의 진정한 가치는 유연성에 있다. 전체를 다시 쓰지 않고도 부분을 개선할 수 있다. 3장이 마음에 안 들면, 3장만 완전히 다시 쓰고 나머지는 그대로 둘 수 있다. 새로운 캐릭터를 추가하고 싶으면, 중앙 관리 파일에 한 항목만 추가하면 그 캐릭터가 필요한 모든 장면에서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창작을 반복 가능하고 확장 가능한 프로세스로 전환시킨다.
2. 버전 관리와 협업
창작물의 모든 변화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관리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사용하는 변경 이력 추적 시스템처럼, 작품의 모든 수정 사항을 날짜별로 저장하고 필요하면 이전 버전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든다. AI와의 협업은 제안 및 검토 과정으로 운영한다. AI가 무언가를 제안하면, 그것을 바로 적용하지 않고 먼저 검토한다. 마음에 들면 채택하고, 아니면 수정을 요청하거나 거부한다.
창작물의 핵심 부분을 완전히 바꾸는 실험을 할 때 버전 관리가 빛을 발한다. 예를 들어 소설의 엔딩을 희망적 분위기에서 비극적 분위기로 바꾸고 싶다고 해보자. 전통적 방식이라면 기존 원고를 덮어쓰고, 마음에 안 들면 복구하기 어렵다. 하지만 별도의 작업 공간을 만들어 실험하면 다르다. 원본은 그대로 두고 복사본에서 새 버전을 작성한다. 완성 후 두 버전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고, 피드백을 받아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다.
버전 관리가 주는 가장 큰 혜택은 심리적 안전감이다. "실험해도 괜찮다"는 확신이 생긴다. 원본이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으니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다. 실패해도 손실이 없다. 이것은 창작자에게 엄청난 자유를 준다.
3. 자동화와 테스팅
반복적인 작업을 자동화하고, 창작물의 품질을 체계적으로 검증한다. 소프트웨어 개발자가 코드의 각 부분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자동으로 검사하듯, 창작자도 스토리의 일관성, 시간 흐름, 문체를 지속적으로 검증한다. 이것은 창작자를 기계적 작업에서 해방시켜, 진정한 창작에 집중하게 만든다.
나는 클로드 코드에게 "귀마의 외형 묘사를 전체 텍스트에서 찾아서 일관성을 검사해 줘"라고 요청했다. 몇 초 만에 31곳의 불일치를 찾아냈다. 어떤 곳에서는 "날개"라고 했고, 어떤 곳에서는 "검은 날개", 또 어떤 곳에서는 아예 날개 묘사가 빠져 있었다. AI가 자동으로 이런 문제를 찾아주니, 나는 수정 방향만 결정하면 되었다. 200페이지를 읽는 몇 시간 대신, 31곳의 목록을 검토하는 10분이면 충분했다.
자동화의 진정한 가치는 인지 부담의 감소다. 오타를 찾는 데 에너지를 쓰면, 플롯을 개선하는 데 쓸 에너지가 줄어든다. 자동화는 이런 트레이드오프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기계적 작업은 AI가 처리하고, 창작자는 창의적 작업에만 집중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AI 시대 창작의 핵심이다.
바이브 코딩, 개발과 창작 분야를 넘어
이 원리는 소설뿐 아니라 모든 반복 업무에 적용된다. 마케팅팀이 20개 채널에 브랜드 메시지를 배포한다고 가정하자. 전통 방식은 각 채널마다 메시지를 개별 작성해 불일치가 발생한다. 하지만 바이브 코딩 방식으로 브랜드 메시지를 중앙 파일에 정의하고, 각 채널은 이를 참조하게 만들면 메시지 변경 시 한 곳만 수정해도 20개 채널에 자동 반영된다. 이것이 모듈화의 힘이다.
기획자가 프로젝트 기획서를 작성할 때도 버전 관리가 필수다. 경영진 검토, 실무팀 검토, 고객 검토를 거치며 기획서는 수십 번 바뀐다. 전통 방식은 "기획서_최종.docx", "기획서_진짜최종.docx", "기획서_진짜진짜최종_0315.docx" 같은 파일이 난립한다. 어느 것이 최신인지, 누가 어떤 의견을 냈는지, 어떤 의견이 반영되었는지 추적할 수 없다. 하지만 체계적인 버전 관리 시스템을 쓰면, 모든 수정 사항이 "누가, 언제, 무엇을, 왜" 바꿨는지 기록되고, 언제든 이전 버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 실험적 아이디어를 시도하다가 실패해도 원본이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HR의 채용 공고 작성에서 자동화의 위력이 드러난다. 10개 부서 공고를 작성할 때, 전통 방식은 HR 담당자가 일일이 읽으며 오타, 문법, 회사 정보 일관성, 법적 요구사항 준수를 체크한다. 공고당 30분씩 5시간이 걸린다. 그래도 미세한 오류는 놓치기 쉽다. 하지만 AI에게 자동 검사를 요청하면 몇 초 만에 "공고 3: 회사명 'ABC Corp' → 표준 'ABC Corporation'으로 수정 필요", "공고 5: 필수 문구 '남녀고용평등법 준수' 누락", "공고 7: '젊은 인재' → 연령 차별 소지 있음" 같은 문제를 찾아낸다. 검토 시간은 5시간에서 30분으로 줄고, 오류 탐지율은 100%가 되며, 법적 리스크는 0이 된다.
재무팀의 월간 보고서 작성도 자동화의 혜택을 받는다. 전통 방식은 담당자가 엑셀 데이터를 보며 주요 지표를 파악하고, 전월 대비 증감을 계산하고, 이상 징후를 찾고, 그래프를 만들고, PPT로 옮기는 작업을 8시간 동안 한다. 하지만 AI에게 "매출, 비용, 이익률을 전월/전년 대비 분석하고, 20% 이상 변동 항목은 플래그하고, 경영진용 A4 2장 보고서를 만들어 줘"라고 요청하면 1시간 만에 완성된다. 더 중요한 것은 AI가 "비용 항목 중 마케팅비 전월 대비 65% 급증 → 원인 확인 필요"처럼 사람이 놓칠 수 있는 인사이트를 자동으로 제안한다는 점이다.
핵심은 같다
직군이 다르고 결과물이 다르지만, 핵심 원리는 동일하다. 중요한 정보는 한 곳에서 관리하고(모듈화), 모든 변경을 추적하며(버전 관리), 반복 작업은 AI에게 맡긴다(자동화). 소설을 쓰든, 마케팅 캠페인을 기획하든, 제안서를 만들든, 고객을 관리하든, 재무 보고서를 작성하든, 시스템 사고로 접근하면 AI가 실행하고 우리는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내 업무는 너무 특수해서 시스템화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바이브 코딩이 소설 창작이라는 가장 감성적이고 비정형적인 영역에서도 작동한다면, 당신의 업무에도 적용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코딩 기술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사고하는 관점이다. 업무를 블록으로 나누고, 반복되는 패턴을 찾고, AI에게 명확한 명령을 내리는 능력. 이것이 AI 시대 모든 직장인이 갖춰야 할 핵심 역량이다. 바이브 코딩을 시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오늘 당장 한 가지만 실천해 보라. 작업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면 그것을 독립적인 모듈로 나눠보라. 자주 반복하는 작업이 있다면 AI에게 자동화를 요청해 보라. 수정한 내용이 있다면 간단히 기록해 보라. 이런 작은 변화가 쌓이면, 몇 달 뒤 당신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일하고 있을 것이다.